Trace, 1997
 

떠나간 이들의 아련한 체취
박홍천 사진전...명상과 서정이 가득한 풍경 담아

노형석, 1997
 

그의 사진에는 눈을 가물거리게 하는 아득함이 있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일자로 맞물린 수평선, 그리고 해변가의 외로운 벤치와 오솔길. 그 위로 바람처럼 서정이 스쳐간다.

서울 청담동 샘터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젊은 사진가 박홍천(36)씨의 ‘체취전’은 명상이 피어 오르는 풍경화 같은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출품작은 지난해 가을부터 올 여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멜버른에서 찍은 중대형사진 30여 점. 작가는 어둡고 바랜듯한 색조의 바닷가 정경에서 헤어진 이들과의 추억과 외로움의 감정 따위를 아련히 되살려 낸다.

작품들은 모두 30분 이상 카메라를 장시간 노출시켜 찍은 ‘만들어낸’ 사진이다. 사진가들이 흔히 셔터를 누르는 순간포착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박씨는 사진을 ‘오래’ 찍어야만 우연한 상이 더 많이 나온다는 주장을 편다. “촬영시간 중에도 자연은 생각치 못한 변화를 끊임없이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몇몇 작품에는 간간이 벤치나 길에 희끄무레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촬영 도중 카메라상에 우연히 끼어든 사람들의 잔상(殘像)이다. 렌즈를 오랫동안 열어두므로 시간이 갈수록 움직이는 물체는 더욱 흐릿한 이미지로 변하고 화면은 깨끗하게 정제된다. 사람들의 유령 같은 형상과 구름들의 선은 꾸준한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며 세상사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소품이 된다.

 

그는 본래 문명비판적인 사진을 찍는 작가다. 80년대 말 일본 도쿄중심부를 찍은 사진 작업이나 올해 과천 서울랜드를 소재로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앨리스에게> 연작처럼 그는 특유의 렌즈노출기법으로 인간성이 말소된 현대문명의 허상을 파헤쳐 왔다. 그런 그가 왜 서정적 풍경을 내걸었을까?

그 이면엔 10년 전 당시 대학생 박씨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다 고속버스 안에서 홀연히 죽음을 맞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 작가는 “이역만리 바닷가의 낯선 풍광을 담고서야 어머니의 부재와 그리움이 절절이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곧 복잡한 세상에서 풋풋한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는 바람과도 연결된다. 사진 속에 흔히 등장하는 텅 빈 벤치는 그런 면에서 자리에 앉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다. 단순 절제된 구도에 덧붙여 핏기 머금은 하늘빛의 창백함은 박홍천 사진의 또 다른 매력이다. 조리개를 오랫동안 열어놓은 탓에 나타나는 이 왜곡된 색채는 사진평론가 김승곤씨의 말처럼 ‘빛바랜 것 같은, 시간에 의해 부식된 것 같은’ 병적인 느낌을 준다. 결국 하늘바다의 아득한 이미지가 시간을 축으로 인간적 상념들과 만나는 그의 사진들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10월 9일까지

 

- 한겨레, 1997.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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